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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평론



상실된 유년과 인형의 집으로의 초대
고충환(미술비평)
야광별. 전등을 끄면 천장이 열린 듯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빛이 총총하다. 실제로 천장이 열린 것은 아니지만, 천장 벽지에 프린트된 야광별이 천장을 천공으로, 방을 밤하늘로, 현실을 비현실로, 그리고 우주로, 그러므로 어쩌면 꿈속 세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 모두가 전등을 끄면서 일어난 일이다. 전등을 켜면 현실이 되고, 전등을 끄면 비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전등은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고, 현실에서 꿈속 세계로 건너가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꿈꾸고 싶을 때 마음속으로 전등을 끈다. 아마도 작가도 그랬을 것이다. 현실에서 비현실로 건너가고 싶을 때면 작가도 전등불을 껐을 것이고, 유년 시절 작가의 방 천장에도, 그런 야광별이 총총했을 것이다.
아마도 성년이 된 작가는 유년 시절의 어두운 방을 밝히던 그 야광별을 다시 소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림 속에 보면 이런저런 창문들이 등장하는데, 집은 물론이고 코끼리 열차에도, 환상 열차에도, 꽃 마차에도, 심지어 물이 있어야 할 오리배 밑창에도 어김없이 창문은 있고, 그 창문을 통해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별들이 총총하다. 특이하게도 창문 바깥 풍경은 낮이다. 낮과 밤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는 것이 초현실주의의 전도된 현실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환상 열차에 올라타는 순간, 오리배에 승선하는 순간 바깥세상과는 상관없이 밤이 열리고, 유년에 방 천장에서 보았던 야광별이 맞아줄 것만 같다. 바깥에서 보기에 밤하늘은 창문으로 단절돼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이다. 그렇게 마치 크리스마스카드에서처럼 밤하늘로 가득한 창문 안쪽이 또 다른 세상 같다.
앞서 야광별은 작가의 유년 시절의 추억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추억을 마음속에, 최소한 무의식 속에 간직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현실원칙을 떠나 꿈을 꾸고 싶을 때면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밤하늘로 가득한 방을 상상했을 것이고, 그렇게 가정된 방이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안도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창문 안쪽 세상은 어쩌면 유년의 작가가 꿈꾸던 세상이며, 성년이 된 작가가 머리에 그리는 이상세계의 표상일 수 있다. 그리고 이상세계를 뜻하는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를 의미하듯 이상으로서만 존재하고, 작가는 실제로도 없는(그러므로 상실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매개로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 꿈꾸는 세계, 이상세계를 표현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인형의 집. 그렇게 작가가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 세계가 다름 아닌 유년의 기억을 소환한 것이고, 자신이 머리에 그리는 꿈꾸는 세계며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란 점을 전제하고 보면, 비로소 작가의 그림 속 정황이 좀 더 쉽게 다가온다. 우선 색채감정이 현실 속 그것과는 다르다. 파스텔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화사하고 장식적인 색채감정이 한눈에도 팬시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 아니면 분신이지 싶은 그림 속 소녀는 흡사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보이고, 인형처럼도 보인다. 그 밖에도 그림에는 이런저런 집들이 등장하는데, 어떤 집 지붕에는 손잡이가 달려있어서 임의로 이동할 수가 있고, 알록달록한 색채와 어우러진 것이 플라스틱 소재의 인형의 집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아마도 순정만화와 팬시 상품 그리고 인형 놀이로부터 상상력을 키워온 세대 감정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코끼리 열차며 환상 열차 그리고 꽃 마차는 말할 것도 없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에버랜드와 같은 놀이동산에 기인한 모티브일 것이다. 그리고 역시 디즈니랜드 풍의 파충류 인간과 나무 인간, 중절모를 쓴 까치와 정장을 갖춰 입은 곰, 유원지의 호수를 유람하는 오리배, 노란 플라스틱 소재의 오리 인형과 물놀이 공, 마치 중력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공중에 떠다니는 알록달록한 알사탕과 딸기와 프레첼 과자, 그리고 작가의 유년으로부터 유래했음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미끄럼틀과 정글짐, 그리고 여기에 밤은 그렇다 쳐도 낮에마저 총총한 별과 느닷없는 무지개가 어우러져 작가의 그림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환상적으로 만든다. 때로 별은 모빌처럼 매달려 있는데, 요람에서 꿈처럼 흔들리던 유년의 추억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물뿌리개가 무지개를 만드는 것도 같고, 물을 뿌려 키우는 것도 같다. 무지개를 키운다? 아마도 작가에게 무지개는 꿈(그리고 이상)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뿌려 무지개를 키운다는 것은 동시에 작가의 꿈(그리고 이상)을 키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오르골. 그리고 이처럼 밤하늘로 가득한, 어스름한 방안에 앉아 오르골의 태엽을 감으면 태엽이 풀리면서 유리공이 천천히 돈다. 그렇게 돌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열리고, 마치 자장가와도 같은, 꿈결에 설핏 들었던 것도 같은 몽롱한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 그때 오르골은 마치 꿈의 오브제 같고, 그 멜로디는 꿈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야광 별빛을 받아 희미하게 발광하는 유리공 속에는 눈 덮인 전원풍경을 배경으로 목에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이 서 있다.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고, 꿈속에서만 맞닥트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현실에서 비현실로 건너가고 싶으면(그러므로 꿈을 꾸고 싶으면) 전등불을 꺼야 하고, 오르골의 태엽을 감아야 한다. 그러므로 전등(그리고 야광별)과 오르골은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경계 위의 오브제가 되고, 꿈속 세계를 열어 보이는 현실 속의 계기와도 같은 일종의 주물일 수 있다.
주물? 무슨 주물? 작가로 하여금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게 해주는 주물이고,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꽃피던 시절의 추억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게 해주는 주물이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도 야광별을 보면 유년 시절이 생각나고, 어디에선가 오르골의 몽롱한 멜로디라도 들려올 때면 자신의 꽃 시절이 떠오른다. 여기서 그 소리를 꼭 들을 필요는 없다. 그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러므로 어쩌면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고 욕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억을 소환하고 추억을 호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착각은 어쩌면 욕망일 수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데자뷰도 착각이고, 알고 보면 욕망이다.
작가에게 그 착각 그러므로 그 욕망은 어쩌면 일종의 프루스트 효과처럼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에서 나는 향과 입안에서 바삭거리는 소리에 자극받아 유년 시절로 회귀한다. 그렇게 야광 별은, 인형의 집은, 오르골은, 오리배는, 미끄럼틀과 정글짐은, 무지개와 프레첼 과자는 작가로 하여금 유년 시절의 자기에게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어쩌면 지금은 상실되고 없는 자기와 맞닥트리게 해주는,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의 자기를 살게 해주는 현실 속의 비현실적인 계기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의 장치.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마음의 장치라고 부른다. 다정하고 아득한 느낌, 태엽을 감으면 들리는 멜로디, 해변에서 주운 조개껍데기, 어느 날의 자장가와 같이 쌓인 채 남아있는 것들, 반짝이는 추억 같은 것들, 막연한 그리움이 되어 현존하면서 계속되는 것들, 그렇게 마음속에 부유하는 것들이다.
작가는 현존하면서 계속되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기를 살게 하는 현실 속 계기들이지만, 정작 그 원천은 계속 되돌아오는 것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건너온 것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유년으로부터 소환된 것들, 사실은 상실과 부재 너머로 귀환한 것들이다. 그래서 아득하고 막연하다. 아득하고 막연하지만, 동시에 다정한 느낌이고, 그 느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사물이(해변에서 주운 조개껍데기), 그리고 더러 소리가(멜로디와 자장가), 그리고 때로 다만 다정한 느낌만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을 살지만, 사실은 어쩌면 지속되는 유년을 살고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가장 전통적이고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저만의 세계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은, 꿈과 환상, 그러므로 초현실주의적인 상상력에 의해 견인되는 것 같은, 아마도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채 재생되고 있는 것 같은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살기 위해, 그러므로 과거를 그리워하기 위해 마음속에 그려놓고 있는 세계이며 장치일 수 있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에게 현실을 산다는 것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과,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산다는 것과, 과거를 그리워함으로써 비로소 살게 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그저 과거에 사로잡힌 삶으로서보다는, 현실을 더 잘 살기 위해 작가가 지어낸 세계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추억의 단편들을,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운 대상들을 현재 위로 되불러온다. 현실을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참조한 것이고, 현실 자체로서보다는 편집된 현실, 재구성된 현실을 예시해준다. 그렇게 편집되고 재구성된 현실은 비록 작가로 하여금 현실을 살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있지만, 여하한 경우에도 그 계기는 사실은 부재와 상실을 건너온 것들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에선 설핏, 그림자처럼, 상실감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렇게 상실된 현실(현실이 상실한 것들)의 알레고리처럼 읽게도 된다.